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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2-13 23:28
박종렬-사랑 그리고 가을의 역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197  

사랑 그리고 가을의 역설

 

 


광주여대 교수 박종렬

  슬그머니 추워지는 창밖의 온기. 그것이 가을 햇살이었어. 너무 뜨거워서 참을 수 없었던 여름 땡볕은, 문득 어느 길모퉁이 플라타너스 아래 묻혀버렸다. 한 때 유행했던 유행가 가사가 혀끝에 맴돈다. ‘가는 세월 그 누가 잡을 수 있나요.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 있나요.’ 가을만 되면 메트로폴리탄에서 살고 있던 두메산골에서 살고 있던, 남자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는 말이 세월이다.

 

      다윗이나 징기스칸, 세종대왕, 아이슈타인도 세월 속에 묻혀갔다. 영웅이나 필부나 누구나 사라지고 누구나 떠난다. 저 낙엽처럼. 가을은 현대인들에게 아름다운 시간을 선물한다. 자아 성찰. 바로 자아성찰의 기회를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준다. 만산홍엽(滿山紅葉) 속에 한 가닥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을 바라보면서,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 온 지난여름을 뒤돌아보게 하면서, 회한과 반성을 되새김질시키는 가을. 주어진 내일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상념의 계절이 불쑥 내 앞에 던져진 것이다. 삶은 무엇일까. 존재하는 것은 이처럼 아름다운데,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걸까. 부와 명예가 무덤 너머 저 영원으로까지 따라 올 것인가. 이제 그림자는 나날이 길어질 것이고, 그 그림자만큼 인생의 시간도 흘러갔을 것이다.

 

    햇살이 어둠에 젖는다. 마음이 춥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멸치국물에 말아주던 따끈한 국수가 생각난다. 가을 낙엽처럼 이리저리 뒹굴다가 어머니 가슴 같은 따뜻한 국수집을 찾았다. 맑은 멸치국물에 말아온 국수 한 그릇. 그 국수를 비춰주고 있는 때 묻은 알전구 밑에서 가난한 저녁을 말고 있는데, 누덕진 삶은 국수발처럼 한없이 길다. 외로울 때에는 외로움에 잠겨 외로움을 잊고, 슬플 때에는 슬픔에 잠겨 슬픔을 잊고 살아왔던 지난 시간들이 국수발처럼 계속 이어져 내 몸에 들어온다.

 

    이 가을에, 왜 나는 인간이어야야 합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가을의 회한에서 빠져 나갈 수 없다. 가을은 꽃들의 절망이 희망으로 다시 피어나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꽃들을 좋아하지만, 꽃들이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견디고 피어나는지 모른다. 한 노인이 한가롭게 가을 벤치에 앉아 있으면,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다고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그 한가로움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견디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나도 이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그것을 알았다. 부와 명예를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한가로움을 얻게 된다는 가을의 역설을 깨닫지 못하면, 항상 치열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끝없이 경쟁하고 이웃을 뛰어 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박관념, 늘 남과 나를 비교하며 느끼는 상대적 빈곤감이나 우월감은 더불어 살아가자는 것 보다는 나만 살아 보겠다 라는 의지이다. 나만을 강조하는 교육, 그 교육에 대한 열정, 그 열정이 가져온 잘못된 가치관이 빚어낸 오늘의 아픔들. 자살과 비리. 대기업 총수 일가의 비자금 조성 혹은 횡령의혹, 권력층과 경제인들의 유착,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학교폭력에 견디지 못한 학생들의 자살, 현대의 물질적 풍요가 준 잔인한 역설......, 가을은 맑고 부드럽고 풍요로운 하늘을 줌과 동시에 콧속을 얼얼하게 톡 쏘는 차가움도 동시에 준다. 바로 추상(秋霜)과 같은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엄숙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귀와 권세, 명예는 저 낙엽처럼 언젠가는 다 떨어져 도로에 휘날리면서 어디론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가고, 몸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는 낙엽들은 아우성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인생의 속도를 조금 줄이고, 옆을 바라보자. 그대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는 배우자나 자식을 바라볼 시간을 갖자. 인간은 사랑한 만큼 젊어지고, 미워한 만큼 늙어간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삶은 분명 성공한 삶일 것이다. 이 가을의 사랑은 저 낙엽이 보여준 지혜를 빌려서 하자. 나를 진정으로 버릴 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